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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현대예술의 철학 1강 사라짐의 미학 I

by 갓미01 201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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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현대예술의 철학 1강 사라짐의 미학 I

 

 

01. 인상주의

 

 인상주의는 합의된 강령이나 미학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고전주의자들과 달리 자신들의 이념을 '카논'의 형태로 고정시키려 하지 않았다. 마네는 인상주의의 선구자이며, 모네와 피사로 시슬리는 일관된 인상주의자, 드가와 르느와르는 부분적으로만 인상주의에 합류한다. 따라서 인상주의의 이데알 티푸스(이상형)를 상정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이들의 작품들 속에 슽어져 있는 '새로운 표현 방식'때문이리라.

 

 

마네 <올랭피아>

 

드가 <무대 위 리허설>

 

 인상주의는 아카데미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하였다. 고전주의는 중요하고 격조 있는 이념들, 사변적인 관념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선별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들은 현실을 무조건적으로 모방하는게 아니라, 그것들을 더 고상하고 더 정화된 모습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그들은 역사적 모범들에서 정제해 낸 '양식', 눈에 아첨을 하는 듯한 '우아함',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규약'을 고집했다.

 

 여기에 대해 제일 먼저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은 사실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술에 '진리'를 말할 의무를 부과했다. 판타지와 포에지를 배격하고, 그들은 회화에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을 정직하게 기록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주제는 영광스런 '과거'에서 빌려온 게 아니라 자신들의 '현재'에서 따온 것이었다. 고전주의자들은 제재를 차별했으나, 사실주의자들에게는 현실의 모든 대상이 묘사할 만한 격조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인상주의는 이 사실주의의 연장이자 동시에 수정이다. 인상주의자들은 대개 사실주의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신성하다"는 블레이크의 모토를, 인상주의자들은 더 세속적이며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수용하였다. 사실주의자들이 가촉적인 현실의 포괄적인 파악을 추구한다면, 인상주의자들은 감각세계로부터 오직 의식에 조정되지 않은 즉각적, 자발적인 시지각의 산물만을 취하려 했다. 그들의 화법에서는 인간의 형상과 물의 형상이 구별되지 않는다.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자들이 아직 갖고 있던 '시간의 관습'을 버렸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묘사의 내실이 아니라 회화적 피상성이었다. 현대예술을 특징짓는 '평면성'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에서 전면과 후면, 하늘과 땅, 인간과 사물, 형상과 배경은 서로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고르게 퍼진 엔트로피의 평면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모든 대상을 색채자극으로 체험하려 했고, 그 결과 작품은 색점의 집합으로 나타나게 된다. 색은 더 이상 사물 자체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망막에 들어오는 빛의 반사로 간주된다. 대상의 형태 역시 선이 아니라 색점이나 색면으로 표현되기에, 색채의 동요와 함께 형태 역시 고정되지 않고 시시각각 변하는 '잠재적 형상'의 성격을 띄게 된다. 지각의 세계가 끊임없이 동요한다면, 그것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 역시 즉흑적 변화의 놀이가 될 수 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상성, 미완성, 카오스, 가독 불가능성 등 당대 사람들을 도발했던 인상주의의 특징이 나온다. 실제로 칸딘스키조차도 모네의 작품에서 '볏단'을 알아뵈 못했다고 한다. 더구나 인상주의자들이 다룬 제재는 모두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대중들이 기대하는 이상적 세계, 이국적 세계, 감상적 일화 등은 존재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이었다. 인상주의자들이 보여준 세계는, 보들레르가 말한 '현대적 삶의 낙관적인 파노라마'라 할 수 있다.

 

 

02. 인상주의와 현대예술의 관계

 

- 예술적 수단의 자립화 : 예술적 모던의 자기규정으로서 '자기 지시성'

- 회화의 피상성과 평면성 : 환영주의의 포기, 공간적 깊이의 상실

- 제재의 무차별성 : 묘사대상의 일상성, 미적인 것의 해체

- 현대적 지각의 시각화 : '모던'의 시지각

- 포인틸리즘 : 화면의 픽셀화, 입자화

 

 

03. 루앵 성당 앞에서

 

 

 

모네 <루앵 성당> 연작

 

 수련을 그리기 몇 년 전에 모네는 루앵 성당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 번만 그린게 아니라 같은 건물을 여러 번 반복해 그리고 있었다. 왜? 우리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인상주의의 신조에 따르면 색이란 반사된 빛이다. 그런데 빛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따라서 성당의 제 색을 표현하려면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을 좇아서 여러 번 그릴 수 밖에. 그래서 그는 아침, 점심, 저녁의 성당을 그렸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의 성당을 그렸다.

 

 과거에도 계열적인 작업을 한 화가들은 있었다. 그래서 똑같은 그림에 여러 개의 버전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묘사 대상의 가장 적확한 표현을 얻기 위해 화가가 같은 대상을 여러 번 그린 결과다. 때문에 이렇게 탄생한 계열적인 작품들 사이에는 모종의 위계질서가 있었다. 말하자며 대상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데에 가장 성공한 작품이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작품이 화집에 그 화가의 대표작으로 오르는 것이다. 그것이 원본을 그린 원작이다.

 

 하지만 모네의 것들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없다. 그림을 보라. 저 다섯 개의 그림 중에서 원작은 어느 것일까? 저 중에서 루앵 성당의 색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한 것은 어느 것인가? 이 물음에 우리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왜? 루앵 성당에는 '고유색'이 없기 때문이다. 색이 빛이라면, 그리하여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이라면, 도대체 어느 색을 루앵 성당의 '고유색'이라 불러야 하는거? "하지날 정오에 본 루앵 성당의 색을 그 건물의 고유색으로 정의한다",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사물에 '고유색'이 있다면 여러 색깔의 작품들 중에서 루앵 성당의 색조에 가장 가까운 것을 하나 고를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고유색'이 없다면, 어느게 루앵 성당의 색조에 가장 가까운지 말할 근거도 사라지게 된다. 회화의 진리가 재현의 올바름에 있다면, 저 다섯 개의 그림들은 모두 옳다. 저들 사이에 위계질서란 있을 수 없다. 루앵 성당의 본 모습은 하나의 그림 안에 남김없이 현현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차이의 놀이 속에, 말하자면 조금씩 달라지면서 이어지는 저 무한한 계열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04. 현실의 사라짐

 

 그림을 인쇄하려면 색 분해를 해야 한다. 이때 총천연색의 그림이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 그리고 그림에 명암을 줄 검정으로 이루어진 네 장의 필름으로 분해된다. 이것들을 걸어놓고 순차적으로 네 번 인쇄홰 비로소 종이 위에 총천연색의 그림을 얻어내는 것이다. 다시 <루앵 성당> 연작을 보라. 각각의 작품들이 거의 단색에 가깝지 않은가? 마치 한 장의 총천연색 사진을 색 분해에서 얻어낸 필름들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성당의 고유색은 여러 개의 단색의 필름들 속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저 그림들 속에서 견고한 물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돌이라는 석재의 견고함을 잃어버리고 마치 호수에 비친 물그림자처럼 어른거릴 뿐이다. 저것은 성당이 아니라 성당의 인상일 뿐이다. 사물 자체가 아니라 화가의 눈에 비친 환영일 뿐이다. 성당은 어디로 갔는가? 이것이 세잔을 괴롭힌 문제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인상주의 회화가 사물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모네의 작품 속에서 돌로 지어진 견고한 성당은 물성을 잃어버린 채 '차이'의 놀이들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원본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원본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의 놀이가 들어선다. 세계는 더 이상 단 하나의 그림 안에 한꺼번에 재현되지 않는다. 현실은 사라졌다. 아니, 현실에 대한 낡은 관념은 사라졌다. 이제 세계는 조금씩 모습을 바꾸며 무한히 이어지는 시뮬라크르의 놀이 속에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 듯, 그렇게 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이게 현실이며, 이게 현대의 지각이다. 모네는 이 현대인의 눈을 가지고 시뮬라크르의 놀이 속에서 현실을 사라지게 한 최초의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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