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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문장을 읽으시오 / 일민미술관 - 인생에 관한 명상

by 갓미01 2014.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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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관한 명상>

 

류달영, 「사상계」, 1957년 5월호, 18~29쪽

 

 고난은 결국 사상과 이념의 빈곤에서 온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하면 모든 것이 염려 없을 줄 알지마는 풍부한 물질 속에서 빈곤한 사상은 언제나 더 큰 비극을 가져온다. 이것은 "항산이 없는 곳에 항심이 없다"는 말씀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이상주의자에 의하여 지탱하고 또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최후의 날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비가 나리는 날이 아니요 최후의 이상주의자가 죽는 날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진으로 싹이 터서 이상의 꽃망울이 자라나다가 허욕의 독충에 잘려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붓이 칼보다 무섭다"는 말은 옳다. 붓이란 곧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붓이 칼에 꺽여본 일은 없다. 칼에 잘리운 붓은 붓이 아니다. 붓은 불사조요 영원의 지배자다.

 

 그림을 감상할 때는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적당한 공간과 시각의 간격을 두지 않고서는 무엇이나 그 모습을 바로 보기 어렵다. 인생을 감상할 때도 다음 없이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세계는 결국 이상주의자들의 소유다. 과거의 역사가 그들의 것이었던 것과 같이 미래의 역사도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장 안 한 놈처럼 무서운 놈은 없다.

 

 이기주의자는 남을 망치고 자기도 망한다. 이기주의의 탈피 없이 개인도 인류도 번영할 수가 없다.

 

 동양 사람이 동양정신에 대하여 자리잡음이 없이 서구정신을 깊게 파고들어 가기는 어렵다. 논어 한권, 불경 한권, 노자 한권 소독(素讀)함이 없이 동양적인 것을 무조건 깍아 말함은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다. (...)

 

 어찌해서 우리나라 꼴이 이모양이냐? 하는 해답은 혼례식장에 가 보면 찾을 수가 있다. 거물 주례, 수가 없는 축사, 고급차의 질주, 굉장한 피로연 등 그 부화경박 허영의 모습은 들뜬 인심의 표본이다. 이것을 객관하면 희극이요 비극이니 희비 쌍주곡이다.

 결혼은 인생의 승패를 결정하는 100m 경기의 출발점이다. 전 정조 인격을 던져 새 인생이 출발하는 긴장한 순간이다. 여기에 엄숙이 없고 진실이 없고 새로운 탄생의 진통이 없다면 그 인생에서 무엇을 바랄 것이랴. 오늘의 결혼식은 인생의 장례식이다.

 

 "전에는 주례를 해 주면 와이셔츠 하나쯤은 선사하더니 요새는 돈을 물 쓰듯하면서도 손수건 하나 없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하는 이가 있다. 축사는 허리를 분지르는 만담일수록 좋다. 묘령의 처녀들도 신부측의 허세를 돕기 위하여 해괴한 음담을 섞어 재담을 편다. 주례는 자기 가정의 평생을 지도할 수 있는 인격자래야 한다. 주례는 사우이에 차려놓은 곶감이 아니다. 사람이 결혼하는 것과 짐승이 서로 붙는 것과의 무엇이 다른가를 모른다. 오늘에 주례는 한 시간 쓰고 버리는 색종이다. (...)

 

 서울역 앞에는 거지 아이들이 우글대고 종로와 명동에는 마카오 양복과 양단치마가 우들댄다. 이 남루한 소년군에게서 받는 피해와 불쾌는 저 호화한 무리들의 그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독립한 제나라 대문 앞에서 제나라 국기 아래서 구대기보다 더 천하게 다루어지는 인생의 싹을 볼 때에 국가의 주권과 인생의 존엄에 대한 모독을 느낀다. 한 국가의 문화의 척도는 생명에 대한 보장의 정도로 결정된다.

 

 거지 아이가 양단치마를 붙잡고 위협하는 것을 보면 괘씸도 하나 실상은 저 자신들의 의지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시켜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저 아이들에게 교양과 도덕을 요구할 양심과 권리가 없다. 우리는 저 짓밟히는 인생 앞에 깊은 참회가 필요하다.

 

 부모나 스승이나 존장에게 '나'와 '저'를 구별해 쓸 줄 아는 대하생과 대학출신이 그리 많지 않다. 20여 년 동안에 배우고 가르친 것이 무엇인가. 모든 것은 '나'에서부터 출발이다.

 

 옳은 것을 위하여 흘린 피가 그대로 썩은 일이 없다. 피는 반드시 제 값을 하고야 만다. 역사는 흘린 피로 뻗어간다.

 

 기술자와 학자의 교수의 구별조차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웃나라의 저명한 교수는 탄식했다.

 

 우리가 일제 36년 동안에 받은 최대의 피해는 '교육의 낙오'이다. 오늘도 국민 교육의 향상만이 낙오를 회복할 수 있는 기본 과제이다. 덴마아크의 번영의 열쇠는 한결 같이 국민의 현명한 교육이다.

 

 사람에게서 돈과 지위와 학벌 등 눈을 속이는 모든 누데기를 떼어 버리고 바라보라. 외국에 가서 이것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진리는 쉽사리 소멸할 것 같지 않다.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외국에 가서 이것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청년의 값이란 그 엠비숀의 값이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기의 이해를 초월할 수 있는 용단성과 순수성이다. 우리나라 청년들은 너무 일찍 짠맛을 잃어버린다.

 

 거지를 불쌍히 여기는 이유가 무엇이냐? 헐벗고 굶주리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만고에 한 번 태어난 인생이 그 인격을 무시당하는 까닭이다.

 

 지나치게 좋은 환경은 언제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사상은 대개 역경의 산물이다. 우리의 탄식거리가 있다면 천여 년 역경 속에서 큰 사상이 못 나온 일이다. 인도는 300년 식민지 노릇에 깐디 하나를 낳은 것만으로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

한 사람의 지혜에 사로잡히는 것은 적은 지혜다. 여러 사람의 지혜를 제 지혜로 쓸 줄 아는 것이 큰 지혜다. (...)

 

 열렬한 유물주의자들은 나는 동정한다. 코끼리 귀를 잡은 소경이 "코끼리는 부채 같다"고 외고집을 쓰고 있는것과 같다. 진리는 결코 한 면만이 아니다. 진리는 여러 면이며 높고 깊고 또 넓은 것이다. 용감은 무지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최대 비극이 무엇인가? 한말로 '자아의 상실'이다. "네 자신을 알라"는 처방이 오래전에 준비되어 있다.

 

 석굴암 불상에서 우리가 감명을 느끼는 것은 그것들이 손끝의 재주에서 나온 작품이 아니요, 혼의 작품이 까닭이다. 깊은 밤에 촛불을 들고 굴 안에 서서 보살상들을 바라보면 보살들이 살아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값싼 화강석을 징으로 쪼던 가슴이 얼마나 진정이었던가. 그 조각가가 곧 보살임에 틀림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데 남들은 그것조차도 모르더라" 이것은 희랍 철인의 말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도 모르는 대가들의 횡행시대이다. 무지라는 것은 자기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

 

 우리나라 신문은 영화와 약과 술을 위해 발간되는 간행물인 듯이 느껴진다. 세계에 이렇게 많은 영화와 약과 술의 광고가 게재되는 신문은 못 보았다. 우리나라에 어디서 좋은 영화와 좋은 약과 고급술이 이렇게 많이 생산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영화를 보고 약을 먹고 술에 취해 사는 사람들인가. 모두 나를 파는 남의 심부름에 지나지 않는다.

 

 돌맹이는 크고 보석들은 작다. 너무 큰 것에만 정신을 빼앗기는 일은 어리석다. 보석처럼 널려 있는 약소국가들에 좀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덴마아크, 스웨덴, 노르웽, 핀랜드, 스위스, 네댈랜드 등등 모두 찬연한 보석들이다. 저들은 힘으로 남을 위압하는 일이 없어 접촉하기 안전하다. 인류의 앞을 걷는 것은 분명히 약소국가들이다.

 

 미국 사람 아닌 영국 사람 아닌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스터 박'이니 '미스터 김'이니 하고 부르는 것은 구역이 난다. '복상' '간상'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친구를 '형'이라고 부르는 칭호는 얼마나 정답고 친근을 느끼게 하고 또 예정 바른 말이냐. '박형' '김형'하고 불러보라. 과연 '미스터 박' '미스터 김'만 어디가 못한가. 사대주의이 씨는 이런 데서부터 뿌리가 자라간다. 사대주의로 제 구실 못한다는 것은 천년이 넘은 긴 세월에 눈물과 피를 지불하고 배운 우리 민족의 교훈이다. 아직 우리의 수업료는 부족하단 말인가.

 

 "시를 모르는 사람하고는 아예 이야기를 말게. 그 사람들은 담벼락일세."

 

 남의 허물에 가혹하고 자기 허물을 관대히 두둔하는 사람을 기독신자로 믿지 말라. 기독의 가르친 교훈은 그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

 

 열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애 다르의 임종의 머리 앞에 앉아서 "너는 착한 아들이었고 나는 부실한 애비었다"고 참회의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나보다 더 너절한 아들 노릇, 엉성한 제자 노릇, 부실한 애비 노릇, 멍텅한 남편 노릇, 무능한 선생 노릇, 그리고 허술한 친구 노릇을 한 이가 또 있을가 하고 울었다. 우리는 생명이 떠나는 자리에서 생명의 존엄을 가장 엄숙하게 느낀다. 죽음은 최대의 교육이다. 죽음이 없이 생명의 존귀성을 발견하는 길을 없을 것 같다.

 

 코펜하겐 왕궁 앞에서 78세가 되는 노인과 이야기하다가 덴마아크 사람들이 영어 잘한다는 칭찬을 지나가는 말에 한 일이 있다. "제 밑천 없는 놈이 대개 남의 말을 잘들 하죠" 하며 쓴 웃음을 웃었다. 일어는 국적을 분별할 수 없도록 잘했고 영어는 미인들 볼쥐어지르게 못하는 것이 한사인데 한글 철자법은 엉망이어도 거리낌이 없다. 어떻게 식민지 굴레를 벗겠는가? 이 노인의 말은 허튼 말이 아니다.

 

 정치적 식민지보다 경제적 식민지에는 더 큰 비참이 들어 있다. 독립은 자립을 말한다. 곧 '인디펜던트'다. 우리는 언제나 서독처럼 원조를 자진하여 끊는 날이 올 것인가.

 

 덴마아크의 교육의 중심은 역사에 있고 우리 교육의 중심은 영어에 있다. 서로 목적하는 바가 이렇게 다른가 충분히 검토할 과제가 된다. (...)

 

 "쉽게 성내는 놈을 무서워 말게. 쉽게 성내는 것은 약한 놈의 특징일세."

 (...)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 이처럼 용감하고 외적하고 싸우는 데 이처럼 비굴한 민족이 또 있었겠느냐" 하고 내 은사 한 분은 분개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지금도 때때로 이 말씀을 회상한다.

 

 "사나이는 나를 아는 이를 위해 죽고 여인은 나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는다." 사실 인생은 자기를 아는 이가 있기 때문에 살맛이 있는 것이다. 현재엔 한 사람의 지기가 없더라도 먼 훗날에는 반드시 나의 지기가 있으리라고 믿으므로 살맛이 있는 것이다. 지기가 없는 세상은 사막이요, 외로운 섬이다. 서울 백망장안도 사막이요, 외로운 섬이다. (...)

 

 종로 뒷골목 깡패들도 죽음을 같이 하는 의리가 있다. 학벌을 뽐내는 지식인들이 명예와 지위와 조그만 이익을 위하여 처신을 종이쪽 같이 함은 깡패에게도 지탄을 받을 부끄러운 일이다.

 

 "한반도는 희랍과 이태리를 합한 것보다도 더 좋다"고 하였다. 우리에게 이 지구 위에서 이만한 면적을 마음대로 골라 국토를 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우리는 결국 돌고 돌다가 다시 돌아와 여기가 좋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하늘 이보다 더 좋은 산천 이보다 더 좋은 바다를 이 지구 위에서 다시 발견할 기링 없을 것이다.

 

 "쥐가 창고 속에서 굶어 죽는다"는 말은 바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스위스, 노르웨이, 핀랜드, 덴마아크의 나라를 보고 그렇게 느꼈다. 우리가 못산다는 것은 기적이다.

 

 "이 세계가 미국의 세계이기보다는 세계의 미국이어야 한다. 몇 억만 년 잠자던 대륙이 세계에 팔을 벌려 자유의 새날에 개방된 것이다. 전 세계에 균등한 이민을 받아들이되 우리에게도 차별이 없어야 한다. 인류의 번영을 위하여 그러하다." 이것이 미국 상륙한 순간에 나의 첫 소감이었다. (...)

 

 내가 외국에서 본 유행의 경향은 그들이 개성을 찾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유행이 이와 다른 것은 올챙이식의 유행이다. 거리는 올챙이의 행렬이다. 제 성격이 없는 것은 비극의 시작이다.

 

 인도의 과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인도의 식자들의 한결 같은 대답은 성격의 건설이라는 것이다. 과연 더 현명한 과제가 무엇일까.

 

 사람들은 시간의 조각사이다. 무한히 펼쳐진 거울 같은 고용한 바다 이 같은 무한의 시간의 바다가 우리 앞에서 뒤로 쉬지 않고 흘러간다. 전인미답의 시간의 바다 위를 눈나린 벌판에 첫발을 디디듯 내가 앞을 서서 새겨가는 조각사들이다. 시간은 우리의 게으름을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들의 조각은 좋으나 그르나 간에 영구불변의 것이다. (...)

 

 "종롱 오고 가는 군중이 전부 한곳으로 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전 인류가 다름없이 한곳으로 달리는 사람들이다. 공동묘지로 공동묘지로 달리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요 또 잊어버리고 있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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