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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현대예술의 철학 2강 사라짐의 미학 II

by 갓미01 2014.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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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사라짐의 미학 II



01 세잔, 현실의 영웅주의


 세잔(1839-1906)이 하려고 한 것은 야외에서 푸생을 그리는 것,즉 "자연을 바탕으로 푸생을 새로이 하는 것"이었다.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자연으로부터 들어온 인상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대신에 그것으로 그림의 질서를 구축하려 하나, 그러면서도 고전주의자들과는 달리 형상화의 과정을 기계적 완성의 도식 아래 집어넣는 것을 거부했다.


 똑같이 아카데미에서 강요하는 고전주의적 관습에 대항하면서도,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색의 시각적 혼합과 빛에 대한 숭배를 넘어서 회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려 했다. "인상주의자로부터 나는 박물관의 예술과 같은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만들려고 했다." 시각적 인상 너머에 있는 그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 기념비적 노력을, 그는 "현실적 영웅주의"라 불렀다.


 현상의 배후에 있는 사물의 추구, 이것이 인상주의의 피상성, 표면성을 거부한 세잔의 문제의식이었다.이 때문에 세잔의 미학은 숭고의 미학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산개되고, 스쳐 지나가 버린다. 하지만 자연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머무나, 그것의 현상들의 상으로부터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예술은 자연에 지속의 숭고함을 부여해야 한다.우리는 자연의 영원함으 비로소 가시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단순한 인상을 넘어, 화폭에 견고한 질서를 부여하고 그 위에서 시각적 종합을 이우려 한다는 점에서 세잔의 작품은 푸생을 닮았다. 하지만 세잔은 푸생과 달리 어떤 고정된 시각의 관습에 의존하여, 미래 완성된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사물이 발생하는 과정을 탄생의 상태에서 포착하려 했다. 때문에 그에게 사물성은 완성된 형태로 고정된게 아니라, 그때그때 새로이 발생하는 어떤것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세잔의 작품은 모종의 긴장 위에서 성립한다. 순수한 감각과 형식의 논리 사이의 긴장, 혹은 (인상을) 받아들이는 눈의 감수성(=수용성)과 형식을 부여하는 오성의 구성적 고려 사이의 긴장. "그림을 그릴 때에 눈과 뇌는 서로 도와줘야 한다. 색채 인상의 논리적 전개를 통해 양자가 서로 상대방을 형성할 수 있또록 작업해야 한다." 여기서 그저 세계를 수용하여 보존하려는 겸손함과 그것들을 하나의 형태상의 구조물로 만들어 객관화하려는 예술가의 야심이 하나로 합쳐진다.


 세잔에게서는 직접성과 근원성에 대한 추구가 감각의 현실에 대한 전제 없는 (고전주의적 시각의 전제들로부터 자유로운) 대결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의 작품에는 현상의 세계에 대한 무의지적인 헌신과 그 세계의 뒤로 육박해 들어가려는 의지의 변증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생성되는 것과 만들어지는 것의 충돌에서 그는 생성되는 것(갓 탄생하는 것)을 우위에 올려놓으며, 주관적인 것을 거부하려 햇다.여기서 그의 미학은 '주체의 죽음'을 선취한다.


* 프로젝트 자체는 근대적이다. 사물을 그리려 했기 때문.

  현대는 모사를 하려하기 보다 구성한다.


 여기에는 모종의 종교성이 있다.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자립화한 예술적 수단의 유혹에서 벗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했다. 예술가는 자신의 주관을 부여하기보다는 자연의 즉자상태를 그려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예술가는 세계창조의 기관이자 영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색채-형태의 점 진적인 대상화, 그것과 대상의 만남, 양자를 화해시켜 그림의 구성으로 만들 때, 우리는 색채로부터 사물의 생성되는 과정, 세계가 회화로 형태 변환하는 과정의 목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02 사라짐의 미학


 루앵 성당은 사라져 버렸다. 묵직한 돌로 된 성당이 필름을 닮은 단색의 웃음들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것이 현실을 사라지게 하는 모네의 방식이다. 현실이 해체된 자리에 남은 것은? 서로 조금씩 차이를 내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시뮬라크르들. <서유기>에 나오는 신통한 원숭이는 제 머리카락으로 수없이 많은 분신을 만든다. 그렇게 끝없이 머리카락을 불어대다가 몸 전체가 그 숨결에 실려 입 밖으로 빠져나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면? 그럼 원숭이는 사라지고 머리카락으로 된 복제들만 남을 게다. 모네에게서 성당의 정체성은 수많은 '차이들' 속으로 해체된다.


 말레비치는 다르다. 그는 거꾸로 모든 차이들을 지움으로써 세계를 사라지게 한다. 이 경우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검은 사각형 외에 아무것도 그러져지 않은 텅 빈 캔버스다. 세상에 존재하는 형태들의 차이는 사라져 사각형으로 환원되고, 그 형태들이 가진 다양한 색의 차이 역시 사라져 검은색으로 돌아간다. 하얀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 속에서 사물들의 차이는 사라지고, 세계 전체는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우주의 특이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렇게 말레비치에게서 차이들은 무차별적인 동일성으로 돌아간다.


 우주에는 시간과 공간과 질량과 빛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있고, 그렇게 빨아들인 모든 것을 다시 토해놓는 '화이트홀'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차이들을 집어삼키는 블랙홀과 차이들을 뱉어내는 화이트홀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 연결고리를 '웜홀'이라고 하는데, 이 통로를 거치면 하나의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다. 벌레가 사과 표면을 기어서 반대편으로 가는 것보다 사과 속을 파먹어 생긴 통로로 이동하는게 더 빠른것과 같은 이치다. 모네의 인상주의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의 관계도 서로 붙어 있다는 이 두 개의 구멍과 비슷하지 않을까?



03. 매체와 숭고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와 그림이다. 모네는 세계의 동일성을 물그림자 같은 환영들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했다. 말레비치는 세계의 그림을, 말하자면 캔버스 위에서 대상들의 재현을 사라지게 했다. 세계 자체는 물그림자들 같은 환영들 속으로 해체되고, 세계의 재현은 검은 사각형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자연도 사라지고 모방도 사라진다. 세계도 사라지고 거울도 사라진다. 현실도 사라지고 재현도 사라진다. 이로써 자연의 모방, 세계의 거울, 현실의 재현이라는 고전 회화의 원리는 무너진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세계의 시뮬라크르들, 물그림자처럼 흐늘거리는 세계의 영상들, 견고한 세계가 아닌 세계의 유령 같은 환영들이다. 그뿐인가? 아니, 남은 게 하나 더 있다. 모든 형상이 사라진 흑과 백의 텅 빈 절대주의적 캔버스, 세상의 모든 대상을 집어사켰다가 다시 뱉어내는 우주의 특이점. 존재자가 튀어나왔다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존재의 근원.재미있게 도 말레비치의 작품은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맞붙은 모양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것이 현대인의 세계감정이다. 19세기에 카메라가 발명됨으로써 세계를 재현할 의무를 사진이 떠맡게 된다. 사람들은 이제 사물의 영원한 상을 담은 회화가 아니라 순간적인 상을 낚아챈 사진을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재현의 과제를 사진에 넘겨준 회화는 이제 눈에 보이는 '존재자'를 재현할 의무에서 벗어나, 점점 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근원적 '존재'를 현시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클레의 말대로 "현대 회화는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모네는 단 하나의 성당을 묘사하기 위해 서로 비슷한 그림들의 계열을 그려야 했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사진, 영화, 인터넷 등의 '매체미학'으로 그 과제를 해결한다. 물감으로 그려진 연작의 자리에 오늘날에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복제되는 기술적 영상들이 나타난다. 그럼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적 기획은? 그것은 오늘날 색면추상이나 모노크롬의 '숭고미학'으로 계승되고 있다. 현대의 캔버스는 화면을 비우고 단색의 바탕을 지향한다. 어느 미디어 철학자의 말처럼 20세기 예술은 "형상금지(정신화)와 영상의 홍수(기술복제)라는 양면으로부터 협공"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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