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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E.H. 카] 05 진보로서의 역사

by 갓미01 2015.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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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E.H. ]


1. 역사가와 사실

2. 사회와 개인

3. 역사와 과학과 도덕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5. 진보로서의 역사

6. 넓어지는 지평선

 

 

전반적으로 고전적인 고대의 저술가들은 과거나 미래에 대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투키디데스는 자신이 기술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중요한 일이라곤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역시 중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루크레티우스는 미래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을 과거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에서 끌어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지나간 과거의 영원한 시간이 우리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우리가 죽은 후의 미래의 시간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밝은 미래에 관한 시적인 비전이 과거의 황금시대를 향한 복귀라는 비전의 형태로 된 것으로서, 역사의 과정을 자연의 과정과 동일시한 순환론적 견해이다. 역사는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 과정이 나아가는 전방에 하나의 목표점을 가정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요소-목적론적 역사관-를 도입한 것은 유대인들이었고 뒤에 가서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리하여 역사는 의미와 목적을 지니게 되었으나 반면에 현세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역사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곧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 역사 그 자체가 변신론이 된 것이다. 이것이 중세적인 역사관이었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세계와 이성 우위라는 고전적인 견해를 회복했으나 고전적이고 비관주의적인 미래관 대신에 유대교도적이고 기독교적인 전통에서 유래하는 낙관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였다.

근대적 역사 기술의 창시자인 계몽 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유대고적이고 기독교적인 목적론을 존속시키면서 그 목표를 세속화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역사적 과정 자체의 합리적 성격을 회복할 수 있었다.

진보에 대한 신앙은 영국의 번영, 세력, 자신감이 한창에 달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 진보와 진화에 대한 혼란

 

계몽 시대의 사상가들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견해를 믿었다. 자연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인정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러한 이유로 역사의 법칙은 자연의 법칙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진보라는 것을 믿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근거에서 자연을 진보하는 것으로, 곧 어떤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으로 다루었는가? 헤겔은 역사는 진보하는 것으로, 자연은 진보하지 않는 것으로 확실하게 구분하여 이와 같은 곤란을 극복했다. 이어 다윈의 혁명이 일어난 뒤 모든 곤란은 제거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진화의 근원인 생물학적 유전과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의 근원인 사회적 획득을 서로 혼동함으로써 보다 중대한 오해의 길을 열어 놓았다.

현대인의 사고는 그동안 여러 세대의 경험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경험에 결부시킴으로써 사고의 유효성이 몇 배로 증대하였다. 획득형질의 전승은 생물학자들이 거부하는 것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진보의 기초를 형성한다.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하여 이루어진 진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보에 명확한 시초가 있다거나 끝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고 또한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역전이나 이탈, 중단이 없는 일직선의 진보를 믿은 적이 없었으며 따라서 아무리 명확한 역전이라도 진보에 대한 믿음에 대해 치명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역사적 행위라는 관점으로 미루어 진보의 본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19세기 사상가들은 흔히 역사의 진보에는 명확하고 분명히 규정지을 수 있는 목표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적용 불가능한 무용지물이란 사실이 입증되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자동적이고 불가피적인 과정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점진적인 발전을 믿는 것을 뜻한다.

진보란 추상적인 용어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적은 때에 따라 역사의 과정 가운데 생성되는 것이지, 역사 밖의 어떤 원천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의 완성 가능성이나 미래에 지상의 낙원이 도래한다는 믿음에 기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점에 관한 한 나는 역사에서 완성이라는 것은 실현될 수 없다고 설파하는 신학자의 신비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것을 향해 전지난 후에야 비로소 분명해지고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에서만 증명될 수 있는 목표를 향한 무한한 진보, 다시 말해 우리가 설정할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한계점이 없는 진보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버리, <후대에 대한 의무라는 원리는 진보의 관념에서 도출된 필연적 귀결이다.>

 

여기서 나는 역사에서의 객관성이라는 유명한 난제에 맞닥뜨린다. 역사에 있어서의 객관성은 사실상의 객관성이 아니라 다만 관계의 객관성, 즉 사실과 해석, 과거와 현재 및 미래와의 사이에 있는 관계의 객관성이다.

 

과거의 진화적 해석은 역사상의 필연적인 기능이기 때문에 이 목적은 어쩔 수 없이 진화하는 목적이 된다. 변화는 언제나 고정되고 변경될 수 없는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정은 역사가의 경험에 어긋난다.

버리, 진보에 관념에 대해 과거와 미래에 대한 예언의 종합을 포함하는 이론

네이미어, ‘역사가는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상기시킨다

 

과거를 해석하는 열쇠는 오직 미래만이 마련해 줄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들은 역사에서의 궁극적인 객관성을 말할 수 있다. 과거가 미래를 조명하고 미래가 과거를 조명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정당화인 동시에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 역사가에 대해서 객관적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

 

1. 이 역사가는 사회와 역사적 상황에서 오는 제한된 시야를 넘어설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

2. 이 역사가는 자신의 견해를 미래를 향해 투사하고, 따라서 그 안목이 전적으로 자기 상황에만 국한되어 있는 역사가들 보다는 보다 깊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과거를 통찰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도, 중요하고 타당한 것을 골라내는 역사가의 선택도, 새로운 목표가 점진적으로 나타남에 따라 진화해 간다. 낡은 해석은 거부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에 의하여 포섭되고 대체된 것이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이라는 것은 우리들 눈앞에 놓인 어떤 고정불변의 판단 기준에 의존한 거시 아니고 또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놓여있는 기준 그리고 역사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발전하는 기준에만 의거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일관된 관계를 수립할 때 비로소 역사는 의미와 객관성을 획득한다.

 

* 사실과 가치의 대립

 

우리의 가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도, 환경을 우리에게 적응시키는 능력도, 환경을 지배하여 역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만드는 능력도, 환경을 지배하여 역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만드는 능력도 모두가 우리의 가치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다.

객관적인 역사가란 사실과 가치의 이러한 상호과정을 가장 깊이 꿰뚫어 보는 역사가를 뜨한다. 사실과 가치의 문제에 있어서의 단서는 진리라는 말의 일상적 용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리라는 말은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에 양 다리를 걸치고, 양쪽의 요소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믿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걸어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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