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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그, E.H. 카] 03 역사와 과학과 도덕

by 갓미01 201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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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E.H. ]

 

 

1. 역사가와 사실

2. 사회와 개인

3. 역사와 과학과 도덕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5. 진보로서의 역사

6. 넓어지는 지평선

 

 

* ‘법칙이라는 개념

 

과학자들이 어떤 것을 발견하고 전혀 새로운 지식을 얻어 내더라도, 그것은 엄밀하고 포괄적인 법칙을 설정함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연구에 대한 길을 열어 주는 가설을 만들어 뜻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사고는 관찰에 그 기초를 두고 어느 정도의 전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으며, 이와 같은 전제는 과학적인 사고를 가능하도록 만드는 동시에 다시 과학적 사고의 조명을 받아 수정되어 나간다.

 

역사가들이 연구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는 과학자가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매우 흡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르크스, <손절구는 우리에게 봉건 영주의 사회를 주고 증기 제분기는 우리에게 산업자본가의 사회를 성립시킨다>

아마 마르크스는 이것을 법칙이라고 주장했겠지만 오늘날의 용어로는 법칙이 아니라 더욱 진보한 연구와 참신한 이해에 도달하는 길을 보여주는 유효한 가설이다. 이와 같은 가설은 사상에 있어서의 불가결한 도구이다.

 

1900년대 초기 독일의 유명한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마르크스주의를 버린 사람들이 겪는 불안감을 고백한 일이 있다.

<지금까지 착잡한 현실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해 준 안온한 공식을 상실했을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발판을 찾아내든가 수영을 배울 때까지는 마치 사실의 망망대해에 빠질 듯한 기분이 든다.>

역사에 있어서의 시대구분에 관한 논쟁 역시 그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역사에서의 시대구분이란 사실이라기보다는 필요한 가설이나 사상의 도구일 뿐이며, 그 시대 구분이 역사 해명에 도움을 주는 범위에서만 유효한 것으로서 그 유효성은 해석 여하에 의존한다.

역사가의 경향은 그가 채택하는 가설로 판단할 수 있다.

조르주 소렐, 어떠한 상황에서는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특수한 요소를 분리시킬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며 역설했다.

<우리는 자신들의 길을 의식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개연적이고 부분적인 가설을 철저히 검토하여 언제나 발전적인 정정의 여지가 남아 있도록 잠정적인 근사치에 만족해야 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과학자는 물론 역사가들도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에서 또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로 점차 진행되어 가며, 자신의 해석을 매개로 하여 사실을 분리하며 해석을 사실에 의해 검토하려는 보다 겸허한 희망을 갖고 있다. 과학자의 연구방법과 역사가의 연구방법이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 과학과 역사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분이 가능하다는 견해에 대한 반론

 

- 과학과 역사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분이 가능하다는 견해

 

(1) 역사는 주로 특수한 것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2) 역사는 아무런 교훈도 주지 않는다.

(3) 역사는 예견하지 못한다.

(4) 역사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 수밖에 없다.

(5) 역사는 과학과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 이러한 논점에 대한 검토

 

(1) 역사는 주로 특수한 것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역사가가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일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역사는 일반화를 토대로만 성장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화가 특수한 사건들이 일치해야 할 거대한 역사의 틀을 구성할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뜻은 아니다.

마르크스, <놀랄 만큼 비슷한 사건이 다른 역사적 환경 속에서 발생한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사건 하나하나의 진행을 따로따로 연구한 연후에 그것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쉽게 발견된다. 하지만 역사 위에 초연하게 서는 것을 최대의 덕목으로 삼는 역사철학의 이론을 열쇠로 사용해서는 절대로 이 같은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 역사이다.

 

역사학과 사회학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 현재 사회학은 두 가지의 상반되는 위험, 즉 초이론적이 될 위험과 초경험적이 될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우선 사회 일반에 관한 추상적이고 무의미한 일반화에 치중하여 자기 상실을 초래하게 될 위험이다. 또한 사회학은 역사적인 사회와 관련되며 각 역사적 사회는 특수한 역사적 원인과 조건으로 만들어진 독자적인 것이다. 그러나 계산이나 분석이라고 하는 소위 기술적인 문제에만 국한함으로써, 일반화와 해석을 회피하고자 하는 시도는 정적인 사회의 무의식적 옹호자가 되려는데 지나지 않는다.

(2) 역사는 아무런 교훈도 주지 않는다?

 

일반화의 진정한 문제점은 우리가 일반화를 통해서 역사로부터 배우려 하고, 어떤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다른 경우의 사건에 적용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울 점이 없다는 주장은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많은 사실들에 의해 논박되고 있다. 경험보다 더 일반적인 경험은 없다.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과거에 비추어서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운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 관계를 통해 양쪽을 보다 깊게 이해시키려는데 있다.

 

(3) 역사는 예견하지 못한다?

 

콩트, ‘과학을 통해 예견이 나타나고 그 예견에서 행동이 생기는 것

 

역사에 있어서 예측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는 일반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나누는 구별에 있다. 역사가는 일반화를 함으로써 비록 특수한 예측은 아닐지라도 장래의 행동을 위한 정당하고도 유효한 일반적인 지침의 제시가 가능하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가는 특수한 사건을 예측할 수는 없다. 특수한 사건은 어디까지나 독자적인 것이고 여기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4) 역사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회과학자와 그의 자료, 역사가와 그의 사실에 상호작용은 연속적인 것이며 부단히 변한다. 이 점이야말로 역사와 사회과학 사이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여거진다.

 

여기서 최근 일부 물리학자들이 물리적 우주와 역사가의 세계 사이의 현저한 유사점을 암시하는 듯한 태도로 물리학을 논하고 있는 데에 마땅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1. 그들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는 불확실성 또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2. 현대 물리학에서는 공간적인 거리나 시간적인 경과도 관찰자의 운동에 좌우되는 척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17~19C를 두루 지배한 고전적인 인식론에서는 어느 경우나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에 분명한 이분법이 전제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자연의 여러 힘을 싸움의 상대라기보다 협력하고 자기 목적에 이용해 나갈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최근의 과학에는 고전적인 인식론이 적합하지 않으며, 더구나 물리학의 경우에는 특히 부적합하다. 이것은 사회과학의 입장에 있어서는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처음 강의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역사 연구와 전통적인 경험론적 지식 이론이 조화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과학은 주체와 객체를 엄격히 분리하는 인식론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이 포함되는 인간이란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고 연구자인 동시에 연구 대상이기 때문이다.

 

(5) 역사는 과학과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역사와 도덕의 관계는 보다 복잡한 문제로, 이 문제에 대한 과거의 논의에는 몇 가지 모호한 점이 있었다. 역사가는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사생활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새삼스럽게 거론할 필요마저 없다.

 

크로체 , <우리의 법정-법류상의 것이든 도덕상의 것이든-은 현재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위험 분자들을 위해 설치된 현대의 법정이며 피고들은 이미 당시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유죄라거나 무죄라고 하는 판결을 받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그들을 고발한다. 어떠한 법정에서든 그들은 과거의 평안함 속에 잠든 과거의 사람들이며 따라서 과거의 사람으로서 역사에 속하는 인물일 뿐으로, 그들의 사업 정신을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판결 이외의 어떠한 판결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역사의 이야기를 한다는 구실을 가지고 재판관과 같이 한 편에는 죄를 문책하고 다른 편에서는 무죄를 언도하고 떠들고 다니며 그것이 역사적인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감각이 없다고 생각된다.>

 

역사적 사실이란 어느 정도까지는 해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역사적 해석은 항상 도덕적인 판단 - 만약 보다 중립적으로 생각되는 말을 듣기 원한다면 -, 즉 가치판단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난처한 입장에 있어 시작에 불과하다. 역사란 하나의 투쟁 과정이며 그로부터 나타나는 여러 결과는, 우리가 그것을 좋게 판단하건 혹은 나쁘게 판단하건 그 판단 내용과 무관하게 또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어떤 집단을 위해 일부 집단을 희생시켜 성취한 것이다. 결국 패배한 쪽은 대가를 지불한다.

 

엥겔스, <역사는 모든 여신들 중에서 가장 잔인한 여신일 것이다. 전쟁뿐 아니라 평화로운경제적 발전에도 이 여신은 시체의 산을 넘으며 승리의 전차를 몰고 전진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몹시도 어리석어서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고난에 시달리지 않는 한 참된 진보를 위해 용기를 발휘하려 들지 않는다.>

 

역사가는 과학자와 달라서 다루고 있는 자료의 성격상 위와 같은 도덕적 판단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사실이 가치라고 하는 초역사적인 기준에 역사가가 굴복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일까? ‘이나 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 그리고 이들을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게 발전시킨 것이 역사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추상적인 관념들은 수학공식이나 논리학의 공식이 자연과학에서 다하는 역할을 동일하게 역사적 도덕의 연구 분야에서도 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 관념은 사고의 불가결한 범주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특수한 내용이 포함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나 쓸모가 없다. 우리가 그때그때 수표에 기입하는 방식이 바로 역사의 문제이다. 추상적인 도덕적 관념에 특수한 역사적 내용이 부여되는 과정이 역사적 과정이다. 사실상 우리들의 도덕적인 판단은 그 자체가 역사의 창조물인 개념적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기준을 내세워 그것으로 역사적 행위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편이든 불가피하게 그와 같은 기준 속에 자신의 역사적인 조건가 소망에 상응하는 특수한 내용을 담아 보려 하는 것이다.

기준을 적용하면서 결함이 생긴다든가, 기준 그 자체에 결점이 있다거나 하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기준을 세우려는 시도 자체가 비역사적이며 역사의 본질 자체가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 일은 역사가들이 직무상 부단히 제기해야만 되는 문제들에 대해 독단적인 해답을 마련하려고 한다.

역사가들이 도덕적 판단을 표현하려 할 때 이라는 지극히 비타협적인 절대적인 말보다는 진보적또는 반동적이라는 비교의 성질을 가진 용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갖가지의 사회나 역사적 현상을 어떤 절대적인 기준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 상호 관계 아래에서 규정하려는 시도이다.

 

진정한 역사가는 모든 가치의 역사적 제약성을 인정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자신의 가치에 초역사적인 객관성을 요구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과 우리가 세우는 판단 기준은 모두 역사의 한 부분이며, 인간 행동의 여타의 특면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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