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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PAGE/Philosphy

철학의 책 04

by 갓미01 2014.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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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소크라테스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해답이나 해석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선, 악, 정의 등과 같은)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 개념들의 근거를 탐구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철학의 최초과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에게 도덕적인 삶이란 사회의 도덕규범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일을 한 뒤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올바른 일'은 오로지 철저한 반성을 통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덕이란 (그리스어로 '아레테(arete, 최고의선)'이며 당시에는 탁월함과 성취라는 의미를 나타냈다) '그 무엇보다 가장 귀중한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악을 행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악한 행동은 지혜와 지식의 부족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때부터 그는 "유일한 선은 지식이요, 유일한 악은 무지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식은 '유일한 선'이기 때문에 도덕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있고, 또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으리의 삶을 끊임없이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증법'

 소크라테스의 사명은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들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것도 아니었으며 바로 그들이 지닌 생각을 탐구하는 데 있었다. 무지의 상황에서 이성적인 토론에 의해 논거를 검사하는 이 방법은 철학적 사고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나타냈다. 이 방법은 경험에 근거를 둔 여러 전제들이 먼저 사실임이 밝혀진 다음, 결론에서 보편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최초로 사용한 귀납논증이었다. 귀납논증은 서양철학의 기초뿐만 아니라 모든 경험과학의 기초가 되었다.

 

 

012. 플라톤 '세속적인 지식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고나 추론에서 어떤 도덕적 개념을 거론하기 전에 먼저 그 개념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정확히 그런 개념이 되었는가를 탐구해야 한다. 그는 모든 사회와 모든 시대에 들어맞는 정확하거나 완전한 어떤 형상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완전한 삼각형이 자연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이런 주장이 사실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완전한 삼각형(또는 완전한 직선이나 원)을 이성을 통해 마음속에서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플라톤은 그런 완전한 형상이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플라톤은 추론을 통해 물질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형상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분명 있을 것이라는 단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하나는 겉모습을 나타내는 물질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플라톤이 실체라고 여기는 이데아의 세계라는 이 두 개로 분리된 뚜렷한 세계는,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것으 찾으려는 문제를 해결한다. 물질세계는 변화에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는 영원하며 불변성을 지닌다.

 

 그 이데아를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이데아적 형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분명 선천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육체는 감각을 소유하고 있고 그 감각을 통해 우리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반면, 우리의 영혼은 이성을 소유하고 있고 그 이성을 통해 우리가 이데아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관찰보다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지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제안함으로써 17세기 합리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

 

 

013. 아리스토텔레스 '진리는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형상이론에 따르면 정의나 녹색과 같은 모든 현실세계의 현상은, 이 현실세계의 모형에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형상'이라는 이데아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이론은 반박하는 데 사용했던 '제 3인간 논증'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논증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떤 인간이 인간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그 인간과 인간의 이데아 둘 다를 모두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제3의 인간 이데아가 존재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는 끝도 없이 이어져 무한히 많은 이데아가 생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상의 사물에 내재되어있는 사물의 실체를 이 세상에서 이미 관찰할 수 있는데, 형상이라는 어떤 가상적인 영역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정말 불필요한 일임을 깨달았다. 플라톤은 (자연에서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원과 같은 개념에서 형상이라는 영역을 확인하려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계를 관찰함으로써 어떤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특정 동식물의 각 표본의 특성을 관찰해 다른 동식물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어떤 완전한 체계를 세우고, 또한 무엇 때문에 그런 특성을 지녔는지에 대해 추론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자적인 연구는 우리가 형상을 인식하기 위해 어떤 선천적인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플라톤의 주장이 틀렸다는 그의 믿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우리는 세상의 경험을 통해 사물을 사물로 인식할 수 있는 공통된 특성이 무엇인지를 알아ㅐㄴ다. 그리고 세상을 경험하는 유일한 방법은 감각을 통해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세계의 사물이 어떤 이데아적 형상의 불완전한 복사본이 아니고 사물의 본질적인 형상은 사실상 각각의 사물에 내재되어있다고 믿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인 특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의 본질과 우리가 그 특성을 어떻게 인식했는가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플라톤의 사상에서 벗어난다(후자는 '인식론, 즉 지식이론의 근본적인 문제다). 선험적인 지식, 즉 타고난 지식을 믿는 합리주의자들(데카르트, 칸트, 라이프니츠)과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경험주의자들(로크, 버클리, 흄)로 나누었다.

 

 생물의 '형상'에는 가죽, 털, 깃털, 비늘 등의 물리적 특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특성들이 무슨 용도로 쓰이고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사실이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있다고 여겼다. 윤리학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세상의 모든 것은 사물의 존재의 완전한 이유가 되는 '4원인설'로 충분히 설명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4원인ㅅ널'은 질료인(사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형상인(사물의 배열이나 형태), 동력인(사물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목적인(사물의 기능이나 목적)을 말한다.

 목적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과학에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생물학의 논리적 확장이라는 주제로 본 윤리학과 관련이 있다. 사물의 목적론적 해석이란 사물의 목적을 설명하는 것이고, 또한 사물의 목적을 안다는 것은 가령 '좋은 눈은 잘 보이는 눈이다'라는 것처럼 사물의 좋고 나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에서 볼 때 '선'을 추구하는 삶이란 우리가 우리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 즉 우리를 최대한 인간으로 만드는 모든 특성을 사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덕이라 부르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듯이 그 해답은 바로 관찰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

 

 '삼단논법'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개의 전제와 하나의 결론으로 구성된 세 개의 명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하나의 공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논리방식에서 분석적인 추론을 사용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힘이 감각에 의존하지 않는것임을 깨달았고, 따라서 이성의 힘은 분명 인간의 타고난 특성이란것을 확신했다. 우리는 타고난 사상이 없을지라도 경험에서 배우는 데 필요한 타고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고난 이성의 힘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구분될 수 있으며, 또한 그 분류체계에서 이간이 맨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관한 글은 19세기 수학, 논리학이 등장할 때까지 논리학에 대한 표준이 되었다. 또한 그의 생물분류체계는 기독교의 '자연의 단계' 즉 '거대한 존재의 사슬'이라는 개념이 되면서 중세시대의 서양사상을 지배했다. 이 개념은 신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는 인간이 지배하는 창조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르네상스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에 대한 경험적 방법이 세력을 떨쳤다.

 17세기에는 경험주의자와 합리주의자의 논쟁이 르네 다크라트가 <방법서설>을 출간한 이후 절정에 도달했다. 데카르트를 비롯해 이후 라이프티츠와 칸트는 합리주의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로크, 버클리, 흄은 반대로 경험주의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최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면서 그의 중요성은 재평가 되고 있다. 특히 그의 윤리학은 현대철학자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들은 '선'에 관한 그의 실용적인 정의를 우리가 윤리적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파악할 핵심으로 여겼던 것이다.

 

 

014. 에피쿠로스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철학사상의 주요 관심은 형이상학에서 윤리학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또한 정치윤리에서 개인윤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기본적인 인간의 개념과 가치관에 대한 진리를 연구한 소크라테스와 같은 초기 철학자들을 탐구하여 어떤 새로운 사상의 근원을 알아냈다. 그는 "현명하고, 명예롭고, 공정하게 살지 않고 즐거운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며, 또한 즐겁게 살지 않고 현명하고, 명예롭고, 공정하게 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쾌락과 고통은 선과 악의 근원이며, 덕과 정의와 같은 본질이 이런 근원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쾌락주의'는 흔히 단순히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곤 한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쾌락은 오직 지식과 우정을 통해서, 그리고 두려움과 고통이 없는 절제생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몇 세기 동안 주류 철학에 밀려 대체로 무시되었지만 18세기에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혁명적인 정치학 분야에서 쾌락주의 사상은 "모든 인간은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유한다"라는 미국 독립선언문에 새겨진 글귀에 반영되고 있다.

 

 

015. 시노페의 디오게네스 '가장 많은 것을 지닌 사람은 가작 적게 소유한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처럼 덕을 추구하며 물질적 편안함을 거부하는 사상을 갖고 있었음은 물론 그 사상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올바른 삶이나 가치 있는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회가 부과한 외부적 제약뿐만 아니라 욕망, 감정, 두려움 등으로 야기된 내부의 불만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디오게네스는 키니코스학파로 알려진 사상가들 중 최초의 인물이었는데, 키니코스라는 말은 '개와 비슷한'이라는 뜻의 '쿠니코스(kunik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이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 관습과 예법을 버리고 대신에 가능한 자연 상태에서 살려는 키니코스학파의 결의를 나타낸다. 따라서 디오게네스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많은 것을 지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문명사회의 관습과 가치관에서 벗어난 자연세계의 리듬에 따라 사는 사람이며, 또한 "가장 적게 소유한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016. 키프로스의 제논 '자연과 일치되어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을 떠난 후, 철학사상에는 두 개의 주요 학파가 등장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키프로스의 제논이 창설한 스토아학파다. 제논은 형이상학적 사색을 견딜 수가 없어서 우주는 어떤 최고의 법칙제정자가 정한 자연법칙으로 지배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현실을 변화시킬 힘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 현실로 많은 혜택을 누리는 일 외에도 잔혹함이나 불공평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논은 또한 인간은 자유의지를 행사하기 위해 이성적인 영혼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어는 누구도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이 좋든 나쁘든 간에 모든 측면에서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성취하고 우주의 최고 법칙제정자의 규칙에 따라 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헬레니즘시대 전반에 걸쳐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후 세력을 확장한 로마제국에서 더 많은 추종자들을 이끌어냈고, 6세기에 기독교가 대신할때까지 계속 번창하여 개인 및 정치 윤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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