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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악해진 세상과 스릴러

by 갓미01 2013.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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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션코드로서의 스릴러

 

 1990년대 이후 극장가에는 흥미로운 추리물들이 개봉중이다. 흥미는 이 추리물들이 우연히도 '연쇄살인'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인류가 두 사람 이상 모여 사회를 이루고 산 이후로 '살인'은 언제나 심각한 범죄로 존재해 왔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살인'을 다루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범죄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것일까? 연쇄 살인과 범죄를 다루는 영화가 우리에게 어떤 위안을 줄까? 범죄를 다룬 스릴러 영화들의 효능과 의미를 살펴보자.

 

-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희대의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희대'라는 수식어는 실상 아직껏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에 대한 우회적 표현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살인의 추억>은 '누가' 범인이냐에 끝까지 매달린다. 하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고 과학적 검증이나 논리보다 감정의 정의가 앞선 형사들은 탈진하고 만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 부각하는 것은 정의나 법을 비웃는 폭력의 잔혹함이다. 모든 범죄 소설에서는 범인이 잡히지만 현실의 범인은 곧 잘 빠져나간다는 사실, <살인의 추억>은 바로 그 사실의 공포를 일깨워 준 셈이다.

 

- <즐거운 살인>이른 책을 쓴 에르네스트 만델은 '범죄소설'이 범죄에 대한 공포를 덜어준다고 설명한다. 실제 상황에서 범죄는 쉽게 소탕되거나 밝혀지지 않는다. 누군가 살인을 한다거나 절도를 한다 해서 범행의 이유와 과정이 '소설'처럼 명백히 드러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델의 말처럼 소설에서만큼은 범행 이유와 범죄자의 정체가 명백히 밝혀진다. 루팡이나 뒤팽과 같은 탐정들이 말끔한 턱시도 차림으로 나타나 미스테리 속의 범죄들을 명명백백히 규명해낸다. 범죄 소설 속에는 해결되지 않는 범죄란 없다.

 

- 그런 점에서 범죄 소설이야말로 가장 통속적인 문학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대개 범죄 소설들이 일정한 서사 유형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하고 혼란에 빠지지만 유능한 탐정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범죄 소설의 유형이다. 범죄 소설은 세상이 해결 가능한 미스테리라는 환상을 준다. 소설은 마치 모든 범죄는 밝혀지고 모든 범인들은 잡힐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뜻이다. 범죄 소설이 가장 먼저 대중 문학으로 자리 잡아 가장 오래 연명하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산업화된 도시 생활의 긴장과 억압을 풀어주는 데 범죄 소설이야말로 제격이었다.

 

- 살인을 다룬 스릴러 영화도 대부분 탐정 소설과 같은 서사를 채택한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의 영화들이 이 같은 전통적 서사를 위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인의 추억>과 여러모로 비슷한 데이빗 핀처 감독의 <조디악>도 그렇다. <살인의 추억>처럼 <조디악>은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조디악> 역시 영원히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을 조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디악>은 범죄는 있으나 범인을 잡을 수 없느 막막함을 보여준다. 연쇄 살인범은 마치 게임처럼 범죄를 거듭하지만 사람들은 속수무책일 따름이다.

 어떤 점에서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아니라 진범이 아니라 범인이 잡혔다는 사실 자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범인은 잡혀야 하고 미스테리는 해결되어야만 한다. 누군가 범인으로 검거되었을 때 진위여부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안심한다. 때문에 누구든 '범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미스터 브룩스>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미스터 브룩스>는 누가 범인인지를 처음부터 밝힌 상태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질문은 '누구'가 아닌 '왜' 혹은 '어떻게'로 시작하는 것이다.  '올 해의 미국인'으로 뽑힐 만큼 사회적으로 성공한 주인공 브룩스는 자신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살인을 저지른다. 놀라운 것은 그의 범죄가 '중독'과 '습관'으로 설명된다는 사실이다. 그의 범죄에는 원한도 이유도 없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런 위험한 범죄자들이 평범한 일상인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섞여 지낸다는 사실이다.

 

- 범인은 잡힌다는 위안이 더 이상 스릴러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사회가 더 이상 허구적 해답으로 위무될 수 없는 상황임을 압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은 늘 영화보다 더 잔혹하고 이상하지만, 이젠 영화조차 범죄를 해결하지 않는다. 그렇게 영화는 달라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2. 느와르, 위험한 여인, 팜므파탈

 

 폭력이 난무하는 갱스터 영화를 느와르 무비라고 부른다. 느와르는 불어로 검다는 뜻이며 조명의 대조가 심한 배경을 바탕으로 어두운 범죄 세계를 그려 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갱스터 영화에는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여성 인물이 있는데 이를 일컬어 '팜므 파탈'이라고 부른다. '팜므 파탈(Femme Fatal)'은 축자적 의미 그대로 위험한 여인 혹은 치명적 여인이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느와르 영화 속 '팜므 파탈'은 2차 세계 대전 및 냉전 시기의 시대상이 반영된 관습적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팜므 파탈'의 의미와 그것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자.

 

- 영화 언어로서 팜므 파탈은 1940-50년대 미국 갱스터 느와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형을 지칭한다. 원래 팜므 파탈은 메두사나 데리라, 유디트처럼 여사 소게 등장하는 악녀를 지칭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메두사는 머리카락이 모두 뱀으로 이루어진 마녀이며 데릴라는 미모로 삼손을 유혹해 힘을 뺏은 여자 그리고 유디트는 적장인 홀로페우스 장군의 목을 벤 인물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가 '팜므 파탈'이라고 부르는 여성형이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 중 하나는 그들이 미모의 여성이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남자의 목숨을 위협한다는 사실이다.

 전통적 의미와 달리 영화 역사에서 '팜므 파탈'은 적에게 원하는 것은 얻기 위해 자신을 속이는 여자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1997뇬 <LA 컨피덴셜>에 등장하는 킴 베이싱어가 맡은 역할을 생각하면 될 듯 싶다. 이 영화에서 킴 베이싱어는 갱스터의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에게 접근해 애인이 되고 그를 돕는다. 느와르 영화 속에서 '팜므 파탈'은 자기 자신의 욕망에 희생하는 인물형으로 그려진다. 자신을 속이고 위장잠입했던 여자들은 적을 진짜 사랑하게 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팜므 파탈 여성형이 영화계에서 주목받게 된 시기가 1940-50년대라는 사실이다. 2차 세계 대전 직후, 전쟁터로 간 남자를 대신해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전쟁이 끝난 후 전장에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남자들이 일해야 할 곳에 여성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내이자 엄마로만 알고 있던 여성을 최초로 사회적 경쟁자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변화가 생긴 것이다. 

 영화사는 전쟁 이후 넘쳐나는 위험한 여성상들을 새롭게 부상한 우먼 파워의 반증이라고 보고 있다. 음모로 가득 찬 전쟁에 대한 환멸은, 남자들이 느끼는 위축감은 치명적인 여성형 속에 융해되어 드러났다.

 

- 한국을 비롯해 최근 영화들을 보면 많은 작품의 주인공이 여성임을 알 수 있다. 2007년 칸느 영화제 경쟁작에 오른 22편의 작품들 중 반 수 가량이 여성 주인공을 다루고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형이 역사적 정황과 사회적 의식의 반영이 되기도 하다는 뜻이다.

 일례로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작품에서 이은주나 어머니의 역할을 수동적이며 나약한 여성형이다. 하지만 팜므 파탈이라 불리는 <타짜>의 김혜수나 <텔 미 썸띵>의 심은하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을 위해 한 치의 동정도 보이지 않는다. <마녀 유희>, <내 이름은 김삼순>, <달자의 봄> 등 드라마의 제목들도 이러한 분위기의 한편을 반영한다. 동시대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직업을 가진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악녀는 바라보는 측면에 따라 여러 가지로 조명될 수 있다. 마녀재판으로 화형 당했지만 현재 영웅으로 추대받는 <잔다르크>도 그렇고 적장의 목을 벤 유디트도 그렇다. 탐미적 화가 클림트는 <유디트>를 정염의 화신으로 그려냈고 젠틸레스키는 그녀를 악녀가 아닌 조국의 영웅으로 그려내고 있다. 요염하지만 치명적인 여성이란 여성에 대한 역사적 시각의 반영인 셈이다.

 

 

3. 범인에 대한 궁금증과 철학적 질문

 

 스릴러 영화는 주로 범인이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수사의 구조를 띤다. 스릴러 영화를 후더닛(whodunit) [각주:1] 영화로 부르기도 하는 까닭도 거의 모든 스릴러 영화가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것은, 최근 스릴러 영화 속에서 자기 자신이 범인인지도 모른 채 수배하는 경우가 자주 목격된다는 사실이다. 수사의 주체로서 범인을 추적하던 주인공은 어느 순간 그 범인이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센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디 아더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에 이르기까지 1990년대 이후 영화사에 각인을 남긴 서스펜스 영화는 공교롭게도 모두 자신이 범인임을 자각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스스로를 수배하는 최근 서스펜스 영화의 공통 현상들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우연의 일치들은 현대 사회의 어떤 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 자기도 범인인지도 모르고 그를 추적하는 이야기의 원형을 희랍 비극인 <오이디푸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동차하고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 때문에 테바이 전역에 역병에 물들어 쇠망하고 있다는 신탁을 듣게 된 오이디푸스 왕은 그 패륜아를 찾아 없앨 것을 명령한다. 문제는 수사가 진행될수록 패륜아의 행적이 오이디푸스의 과거와 중첨되어 간다는 데에 있다. 테바이의 왕인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 바로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동침해 아들이자 동생을 낳은 패륜아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오이디푸스>의 서사적 궤적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는 자신을 감금하고 그의 가족을 파경에 이르게 한 범인을 찾기 위해 나선다. 그런데 수사 끝에서 발견하는 것은 저질러스는 안 될 패륜을 저지른 오대수 자신의 모습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에 등장하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내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끔찍하게 살해되어 버린 아내를 상처로 간직한 채 범인을 찾아 복수할 것을 다짐한다.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그는 기억의 단서들을 몸에 새겨둠으로써 불완전한 기억을 보충하고자 한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부분, 그는 결국 아내를 죽인 자가 자신임을 알게 된다. 복수를 다짐했던 살해범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 몸에 새겨둔 문자를 믿고 수사를 진행해가는 사내는 문명의 위력을 맹신하는 현대인을 연상케한다. <식스센스>, <디 아더스>, <거미숲>과 같은 현대 추리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적 주체들의 형편도 사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이성적 수사의 주체로 상정하고 맹신한다. 중요한 것은 그 지혜로운 자가 결국 스스로 구축한 이성의 틀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는 점이다. 현대 문명의 형편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문명의 발전이 문명의 쇠망을 재촉하는 아이러니가 현대 문명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간계를 지혜로 이겨내고 왕이 될 정도로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자였다. 이성의 주체이자 권력의 핵심이었던 오이디푸스 왕의 자멸이 이성과 질서로 지탱되는 현대 문명의 자책수를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수배한 범인을 거울 앞에서 발견하게 되는 최근 서스펜스 영화는 이성과 과학으로 이루어진 현대 문명사회의 형편을 반성적으로 조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술적 세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인간의 이성이 족쇄가 되어 인간을 얽어 맬 수도 있다는 반성적 불안, 그것이 바로 최근 후더닛 영화 속에 나타난 자기 검거 드라마의 본질이다.

 

* 그리스 로마 신화는 현대 문명과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특해 현대 문명의 득과 실을 설명할 수 있을 그리스 로마 신화가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 본다.

** 자멸하는 이성적 주체를 그린 또 다른 영화 목록들을 찾아본다. 과학 만능주의와 합리적 이성에 대한 맹신이 어떻게 결부되고 발전되어 왔는지 구체적 작품을 통해 규명해본다.

*** 역사적 인물 속에서 어떤 각도로 보았을 때 팜므파탈로 볼수 있는 인물을 다른 각도로 재해석해 본다. 반대의 경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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