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로와 미궁
- 보르헤스의 소설 <두 왕과 두 개의 미로>
바빌로니아의 왕은 정교한 미로를 만들어 아랍의 왕을 가두었다.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길을 잃게 되는 지독한 미로였다. 아랍의 왕은 신에게 도움을 청해 가까스로 미로를 빠져나왔다. 아랍의 왕은 자신에게도 멋진 미로가 있다며 바빌로니아의 왕을 초대한다. 아랍의 앙은 바빌로니아의 왕을 낙타에 태워 사흘을 걸었다.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왕에게 말한다. "오 시간의 왕이시고, 세월의 본질이자 비밀이시여! 바빌로니아에서 당신은 나로 하여금 수많은 계단들과 문들과 벽들로 된 미로 속에서 길을 잃도록 만들었소. 이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올라갈 계단들도, 밀칠 문들도, 내달아야 할 하염없는 복도들도, 당신의 앞길을 막는 벽들도 없는 나의 미로를 보여줄 기회를 부여하였소." 그런 다음 아랍의 왕은 바빌로니아의 왕을 풀어 주었고, 그난 사막 한 가운데 남겨졌다. 바빌로니아의 왕은 거기서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었다.
- 아랍의 왕에 데려다 준 사막이라는 미로는 우리의 삶을 의미한다. 이 이야기는 아무리 치밀하게 만든 인공적 미로라 할지라도 신이 부여한 인생이라는 미로보다 더 지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논리는 보르헤스의 다른 소설 <두 왕과 미로>에서도 반복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미로가 미로일 수 있는 것이 바로 계단과 문, 벽돌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인생은 막힘과 상승, 하강 때문에 인생이 인데, 만일 삶에 계단이나 문, 벽돌로 상징되는 장애물이 없다면 그 삶이야말로 지옥일테다. 무간지옥의 중핵은 무간, 그러니까 끝이 없다는 것이다. 끝이 없는 길, 출구가 없는 미로, 죽음이 없는 삶이야말로 지옥이며 도착이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혼돈과 정신병이 만여하고 참수된 머리들과 절단된 수족들이 널려 있는 세계의 밤, 아테(Ate)일 테다.
- 그렇다면 계단이나 문, 벽돌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가리켜 판단오류라고 명명했다. 비극의 주인공은 어떤 판단을 할 때 저지르는 실수를 통해 삶의 심오한 진리를 관객에게 전달하게 된다. 이 비극적 오류는 어쩌면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순간 순간 행하게 되는 선택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미로를 헤맬 때 갈림길 앞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리게 된다. 행위는 선택에 따라 이어진다. 과연 이 선택에 최선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보르헤스의 다른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 보여주는 상황도 선택의 불가사의에 닿아 있다.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간은 다만 셀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영원히 갈라'질 뿐이다. 그래서 그 시간들 중의 하나에서 누군가는 나의 적으로 나타날 도 있고 나의 친구로 바뀌어 있을 수도 있다. 사후적 관점에서 보자면 선택은 모두 필연적이지만 미래를 예측하고자 할 때 선택은 우연에 불과해 진다. 그래서 과거는 돌아보면 비극이고 내다보면 희극이 된다.
- 미로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탄생이라는 입구, 죽음이라는 출구로 이루어진 직선의 길이라는 점에서 착안된 인공물이다. 어떤 미로이든 입구와 출구가 있디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미로는 미궁과 비교되는데, 미궁은 입구가 있으나 그 종착점이 중심으로 귀결되는 폐쇄적 구조물이다. 미로는 입구와 출구가 정해졌지만 그것을 빠져나오는 통로가 수많은 가지로 분산되는 인생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적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운명은 반복되고, 변형되고, 병립하기도 하면서 계속 확장' (<전체와 무>)될 수도 있다. 마치 미로처럼 말이다.
- 아랍의 왕이 버려진, 계단도 문도 벽돌도 없는 사막이라는 미로는 그러므로 미로가 아닌 미로이며 선택이 제거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다면 행복과 불행은 쉽게 구분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거기엔 혼란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흥미로운 비유법을 착안해 낼 수 있다. 아랍의 왕이 빠져나올 수 있었던 바빌로니아의 왕은 수많은 장애물로 만들어진 잘 짜여진 인공물이었다. 이 인공물 안에서 아랍의 왕은 '신'에게 의존해 결국 출구를 찾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반면, 바빌로니아의 왕은 신을 찾지 못하고 다만 '그분'(?)과 함께 있을 뿐이다.
- 두 왕이 처한 상황은 마치 비극의 주인공과 소설의 주인공처럼 구분된다. 바빌로니아 왕이 만든 정교한 미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완미한 비극의 플롯과 닮아 있다. 비극이라는 미로 안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고 마침내 스스로를 발견하는 고귀하고 도덕적인 주인공이 있다. '신'을 버리지 않는 한 그는 이 지독한 미로의 출구 앞에 설 수 있다. 반면 바빌로니아의 왕이 서 있는 사막은 루카치가 말했던 총체적 완전성으로서의 신이나 비극이 사라진 이후 소설의 공간과 닮아 있다. 현대 소설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엄격한 교사를 두지 않는다. 주인공이 그처럼 도덕성이나 존엄성을 가질 필요도 없다. 처음과 중간 끝이 완결되어야 하지도 않고 선택과 행위가 분명이 드러날 필요도 없다. 선택과 행위는 필연보다는 우연에 의해 조종된다.
- 하지만 과연 어떤 주인공이 더 불행할까? 비극을 이론화 할 수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그리스의 시민들과 비극을 살아야만 하는 21세기 현대인들 중에 누가 더 수사적 의미에서 비극적일까? 우리 시대에도 비극은 있을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그리스 비극이 그리스사회에 너무도 필연적인 예술의 형태였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소설은 어떤 점에서 필연적인 것일까?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엔 과연 입구와 출구가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질문은 과연, 비극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2.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 비극의 주인공은 '행동'하는 인물이다. 그는 비극에서 자신의 도덕적 목적을 드러내야 하며 이 인물의 행위는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것이어야 한다. 비극의 인물들이 하는 행위는 따라서 선하거나 그렇지 않다. 우리 역시 이 주인공들처럼 스스로 선택적 행위를 해서 자신의 인생에 불행이나 행운을 초래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고전적인 비극의 세계와 현대 소설의 세계가 구분되는 지점은 모든 행위를 이끌어 내는 최초동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지한 드라마, 비극의 최초동기를 운명이라는 지점에 둔다. 운명은 선택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말하자면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거듭 선택하지만 오히려 선택은 운명의 조우를 재촉할 뿐이다. 반면, 보바리 부인이 3류 연애 소설을 보는 것은 선택이다. 그녀가 3류 연애 소설을 읽도록 운명 지어지진 않았지만 그녀는 수많은 읽을거리 중 연애 소설을 선택했고 그와 유사한 삶을 이상으로 선택했으며 따라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선택한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의 최초 동기는 신탁이었으며 보바리 부인의 최초 동기는 3류 연애 소설의 독서라고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바리 부인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분명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진지한 드라마의 세계와 소설의 공간은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든 생각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고귀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삶을 여전히 엉망으로 만들기도 한다."거나 "인간의 불행은 인간의 원초적인 충동 때문이 아니라 잘못되 판단 때문에 일어난다"는 말은 비극뿐만 아니라 우리가 비유적으로 비극적이라 부르는 대개의 소설적 상황과도 통한다.
- 비극은 사실 그리스 관객들에게 '연민과 공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용론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카타르시스라는 용어로 일반화된 이 정서적 배설(Emotional Purging)에서 연민이나 공포는 엄밀히 조작된 극적 구조 안에서 창출되는 매우 특수한 감정을 일컫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따르자면, 연민과 공포는 우리보다 조금 더 도덕적으로 우월한 인물이 의도가 아닌 판단 오류를 통해 겪게 되는 고통을 시작과 중간 결말을 통해 개연성있게 드러낼 때 얻어낼 수 있는 관객의 반응이다. 그러니까 연민과 공포는 결코 우연히 양산되지 않는다. 이는 연민이나 공포가 단순한 동정이나 슬픔과는 구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슬픔은 가치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아무 슬픔이나 비극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슬픔, 비극적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는 일들을 '사건'이라 부른다.
- 우리가 '비극적'이라고 말하는 사건의 핵심은 어떤 슬픔으로 구체화될까? 흥미롭게도 우리가 비극적이라 부르는 사태들은 하나같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주검이 된 딸, 더 이상 따뜻한 입김을 내뿜지 않는 코딜리어를 품에 안은 리어는 "난 어디에 있었지? 여기는 어디고? 대낮이야?"라고 묻는다. 데스모나의 정절을 의심했던 오셀로 역시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오셀로는 어디로 가야지요?"라며 스스로를 3인칭의 고유명사로 부르며 헤맨다. 이는 오이디푸스가 사건의 진실을 접한 이후 스스로를 부정하며 자신의 눈을 훼손하는 태도와 견줄 만하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분열을 겪고 나서야, 그러니까 부정성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나서야 자신을 목격한다. 이 부정성의 재현으로서 오셀로는 강렬한 질투를 경험하고 리어 왕은 딸을 죽게 하며 오이디푸스는 결국 자신으로 판명된 범인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비극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대상화하는 자기 분열의 지점을 보여준다. 이는 진리란 오류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다는 명제의 반복으로 들리기도 한다. 잘못된 출발들, 균열을 통해 진리는 그리고 '나'는 객관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피의 검증을 통해 왕과 남편, 아버지로서의 스스로가 아닌 패륜아, 아들, 오빠와 형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비극을 통해 '나'는 진심으로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하게 된다.
이는 거꾸로 말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야말로 비극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극은 대타자가 보는 '나'와 자신이 보는 '나'사이의 간극을 확인시키며 그것을 스스로 분리할 수 있게끔 만드는 여정이다. 우리가 '비극적'이라 말하는 사건의 핵심 그리고 연민과 공포의 중심에는 바로 회복될 수 없을 만큼 분열된 이 거리가 있어야만 했다. 오이디푸스에게 운명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지고의 존재였던 스스로를 바닥에서 발견하는 자기 모멸을 거쳐서야 비로소 진짜 '자신'을 알게 된다는 것에 함축되어 있다. 그의 이름처럼 그는 총명하고 지혜로운자(oida:알다)와 다리를 저는 패륜아(oidea:부풀다)로 분열되어 있다. 하지만 콜로노스의 숲으로 갈 수 있는, 스스로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는 이 분리를 거쳐야만 발견될 수 있다. 파스칼의 말처럼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괴물'로서의 인간을 긍정하는 지점에서 '나'는 발견된다.
- 이해할 수 없는 괴물로서의 인간, '나'를 발견케 하는 이야기가 바로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비극이라는 용어를 역사적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주의자의 반감이 있을 수 있다. 프랑코 모레티와 같은 문학이론가들은 비극을 역사적 실존의 재현물에 대해서만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보수적 이론가들이 비극을 예술의 영역, 인공물의 구조로 한정함으로써 현실 생활의 모든 것을 다 비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순수하게 인공적인 서사물의 자격 조건으로만 보는 극단적 보수주의와 구별되지 않는다. 비극을 역사적 실존의 재현에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을 완미한 인공물에만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와 이상하리 만치 닮아있으니 말이다.
- 이런 맥락 속에서 보자면 비극은 사회 질서나 법질서의 존재를 위해 유용되는 초월적 거점에 불과해진다. 그렇다면 연민과 공포는 미학적 효용이 아니라 정치적 효용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비극이 정치적 도구였다면 이 또한 상상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만약 비극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상상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그러니까 상징계적 갈등들을 통해 제시된 우리 사회의 중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 중핵이 우리에게 연민과 공포를 제공할 수 있다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발견하고 보고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시대의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을 보며 마음껏 울 수 있는 슬픔과 연민을 느끼는지 아니면 결코 나는 그렇지 않아, 라고 외치며 그 인물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지에 따라서도 비극의 여부와 가치는 달라질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보게 될 이야기가 진정 우리 시대의 비극이라면 아마도 오이디푸스처럼 결코 저것은 내가 아니야, 라고 우선 거부하게 되지 않을까? 그 모습이 지금의 '우리', 현대 사회에서의 개인의 모습 그 중핵을 건드려 실재계를 홀려버렸다면 말이다. 결국 가장 우리 시대의 문제를 그럴듯하게 드러내면서도, 가장 '우리'임을 수긍하고 싶지 않은, 언캐니(uncanny)하고 불편한 인물들이야말로 바로 이 시대를 누설하는, 비극적 인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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