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단 두가지다.
멋진 영화와 끝내주는 영화. 이번엔 후자다.
- 이동진
'그 영화 정말 좋아.'라고 할 때에는 그 영화의 시선이 좋다라는 뜻을 포함한다. <장고 : 분노의 추격자>(이하 <장고>)에서 알 수 있는 타란티노의 재기와 예리한 시선은 정말이지 섹시하다. (영화 보고 나서 감독과 제발 한 시간만이라도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건 처음이다.)
대표적인 고전적 서부영화인 <셰인>. 어디선가 찾아든 영웅이 약자를 구해주고 홀연히 떠난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서부를 누비며 아무데나 총질하지 않는 셰인은 미국인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도 동경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장고>는 타란티노와 서부영화의 완벽한 콜라보레이션이다. 서부영화에 대한 백인들의 로망을 비틀면서도 서부영화의 진수를 맛깔나게 보여주는 이 아이러니. <셰인>의 셰인은 안정과 사랑을 포기하고 어디론가 또 다시 향하지만, 타란티노 <장고>의 장고는 오직 사랑하는 연인인 브룸힐다를 향한다. 너무했다. 로맨틱하기까지 하다면.
<장고>의 인물들을 너무나 다양하고 입체적이다. 흑인 노예들 위에서 군림하는 캔디와 그의 충직한 집사 스티븐. 미국의 노예제도와 관련이 없는 독일인 슐츠 박사와 똑똑한 일당백 흑인 장고. 흑인노예들을 관리하는 멍청하고 늙은 백인들, '백인처럼 말을 타고 다니는' 장고가 기분 나쁜 흑인노예들. <장고>는 분명 백인들의 인종차별과 그들의 역사를 비꼬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선과 악, 또는 흑과 백으로 나누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한편 장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흑인 노예 한 명을 개에 물어 뜯기게 둔다. 집사 스티븐은 장고와 브룸힐다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캔디에게 알린다.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부당하다고 비난해야 한다면 부당한것은 비열한 백인들의 노예제도다. 강자는 강자의 방식으로 이기고 약자는 약자의 방식으로 이길 뿐이다.
<장고>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면 <장고>는 오프닝부터 만족시켜줄 것이다. 누구에게나 영화의 명장면은 음악과 함께 남는다. 오프닝 시퀀스의 미국 서부의 커다란 돌덩이들과 끌려가는 지친 흑인 노예들, 이 영화가 바로 장고다! 내가 바로 장고다!를 외치는 음악, 육중한 붉은색 타이포. 잔인하게 아름다운 장면이다.
영화 중반부에서는 장고가 말을 타고 누비거나, 총질을 할 때 힙합 음악을 듣게 된다. 서부영화에서 듣는 2pac이라니! 이것이 흑형간지다!
한 많은 장고도 독일의 브룸힐다 전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귀를 기울이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렇게 사랑하는 브룸힐다가 뜨거운 관 안에서 벗겨진 채로 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목격할 때, 우울한 선율의 음악.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 두 번 보고싶다. 영화는 누군가에게 면죄부를 주지도 않고 분노할 것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단지, 장고는 사랑을 되찾았고 자유를 쟁취 해냈다. 셰인은 혼자 떠났지만 장고는 브룸힐다와 함께 떠났다. 나는 그것을 참 다행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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