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바르트 | 사랑의 단상
"씨부럴, 오늘도 이론이야."
알 수 없는 것 inconnaissable. 사랑의 관계에 대해 특별히 알고 있는 사실들과는 무관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성격이나 심리적인 것 혹은 신경증적인 유형에 의해 사랑하는 이를 '그 자체로서(en soi)' 이해하고 정의하려는 노력.*
1. 나는 그 사람을 읽는다. 그 사람의 역사를 몰래 들춰내어 나의 언어로 번역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말투를 따라 하고, 그 사람의 오랜 습관을 흉내 낸다. 그 사람의 취향에 굳이 동의하며, 그 사람의 의미 없는 행동에서 기어이 어떤 기호를 찾아내고야 만다. 그 사람의 꿈 이야기를 듣고 멋대로 해석하여 뿌듯해 한다. 그 사람을 요약하고는 나와 그 사람의 관계를 그리 궁금해 하지 않는 이에게 수줍게 고백한다. "천천히 알아 가고 있는 중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이미 알고 있지만 털어놓지 않은 사실들에 대하여 마치 그 사람과의 비밀을 끝까지 지켜낸 것처럼 기뻐하고는, 멍청하게 그 사람을 중얼거린다.
그것은 해독의 과정이다. 목표는 그 사람의 전부를 이해하는 것. 빠른 속도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편법을 사용한다. 알지 못하는 데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2. 어느 순간 나는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드러낸다. 보여준다. 멈춰 서서 읽게 한다. 그것은 교육의 과정이다. 목록은 내가 보여주길 원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으며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나는 그 사람이 내가 의도한 결과에 이르길 기대하고, 기다린다. 그 사람을 나로 계몽하려 한다. 열정적인 설교를 시작한다. 그럼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나는 나의 편집증적인 슬픔을 표현한다.
3. 나는 마치 사전을 만드는 것 같다. 나는 그 사람을 정의하며 빠짐없이 기록하고 분류한다. 그것에는 어떤 예외도 용납되지 않는다. "왜 그래? 원래 안 그랬잖아"라며 나는 억울해 한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라는 언어 안에 갇힌다. 아니, 내가 그 사람을 그 사람이라는 언어 안에 가둔다.
반전(retournment):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라는 말에는 거짓이 없다. 서늘한 비수 끝이 뒷덜미에 와 닿는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알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전이 부스러지고, 그 사람이라는 언어 체계가 조각난다. 나는 비애 속에 놓인다.
그제야 나는 생각한다. 그 사람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이해는 오독의 결과이고, 모든 언어는 오해의 산물이다. 사랑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관계는 서로를 읽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4. 또는 그 사람을 정의하려는 대신 나는 내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탐독한다. 그것은 나의 무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나 역시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알 수 없음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그곳에 그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고, 읽거나 채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 사람을 남겨 둔다.
또한 나는 그 사람 대신 내 자신을 언어화한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의 글쓰기이다. 나는 그것을 통해 사랑을 확인한다. 서두의 논지를 이제 나는 고쳐 쓸 수 있다.
알 수 없는 채로 남겨 두는 것 vacuité.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정의하려는 노력을 배제하는 것 혹은 그런 수수께끼의 빈 공간에 사랑하는 이를 그 자체로 내버려 두려는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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