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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by 갓미01 201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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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많이 읽는 아이가 글을 많이 쓰는 아이보다 자연스럽다. 누군가의 글이 좋다거나, 어떤 작가가 내게는 좋게 느껴지는구나 하고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것 같다. 마음에 드는 글을 접하고, 글쓴이도 함께 마음에 들어올 때, 나도 글을 잘 쓰는 누군가고 되고 싶단 생각을 해봤던 것 같다.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줘야 아나요라고 물었다던 어린 아이의 질문이 떠오르고 망설여진다. 어쩔 수 없다. 무엇을 어떻게 쓸지보다 어떻게 무엇을 쓸지가 고민이 되는 것을.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는 소설창작론이지만 일반적인 작문법을 탐독하는 것보다 유익했다. 



 1. 

 회의는 7시에 개최될 예정입니다. 가 아니라 회의시간은 7시입니다라고 어깨를 쫙 펴고 그 회의를 당당히 선포할 수 있다. (이것은 글 뿐 아니라 평소 대화에도 적용된다.) 수동태는 안전하고 골치아픈 행동을 스스로 감당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수동태가 글에 신뢰감을 나아가 어떤 위엄까지 지니게 해준다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나의 첫키스는 철수와 나의 사랑이 시작된 계기로서 나에게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는 개방귀 같은 소리다. 이 말을 좀더 간단하게, 더욱 감미롭게 표현하는 방법은 `철수와 나의사랑은 첫키스로 시작했다. 나는 그 일을 잊을 수 없다.` 아주 멋진 문장은 아니지만 시작된 계기 또는 길이길이 같은 똥방귀보다는 낫다.


2. 

 가벼운 수필에서는 갈팡질팡하는 것이 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좀 더 진지한 주제를 가지고 좀 더 격식을 갖춘 글을 쓸 때에도 두서없이 갈팡질팡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다. 글은 다듬어진 생각이다. 논문을 쓰면서도 `이제훈의 좁은 어깨가 용서되는 이유`라는 블로그 포스트보다 논리 정연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3. 

 적확한 직유법은 낯선 사람들 틈에서 옛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쁨을 준다. 하지만 간혹 직유는 은유가 제 구실을 못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우스워진다. 

`그는 시체 옆에 무신경하게 앉아서 칠면조 샌드위치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참을성 있게 검시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가 쓰고 있는 말을 작가 자신이 이해하고 있다면 나도 기꺼이 함께 따라갈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자기도취에 빠진 글을읽으려고 책을 사는 독자는 없다.


4. 

 백지 앞에서 경박하지 말 것. 그렇다고 경외감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만 쓰라는 것도 아니고 유머 감각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다. 글쓰기는 인기 투표도 아니고 도덕의 올림픽도 아니다. 하지만 글쓰기란 세차를 하거나 눈화장을 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일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 부사를 덜 쓰려 했고, 쓸데없는 비유를 덜 쓰려 했고, 생각과 글을 다듬었다. <미정이>에 싣는 글에 그나마의 성의를 갖출 수 있게 됐다. 키보드 앞에서 경박하지 말 것을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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