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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서양미술사 13강. 추상에 관하여 02 추상에 관하여
01. 표현주의
보링거는 문명의 초기에는 추상충동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것을 통해서만 인간이 안정감을 느낀다고 했다. 원시 예술을 긍정한 것이다. 소위 원시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도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예술이라는 얘기가 된다. 원시인들은 대자연 앞에서 공포를 느꼈다. 그 공포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양식 자체가 추상적으로 변하고 그 부분에서 표현주의가 들어가는 것이다. 현대인들도 20세기에 세계와 친화성을 느끼지는 못하고 변해가는 세계 앞에서 현대인들도 공포감을 느낀다. 원시인들이 자연 앞에서 느낀 공포를 현대인들은 사회 앞에서 느끼게 된 것이다. 이때 추상적인 양식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독일의 표현주의다.
02. 표현주의의 추상 - Kirchner
키르히너다. 굉장히 강렬한 원색이고 삐쭉삐쭉하다. 유기적인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이렇게 표현주의의 바탕에는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불안감, 공포감이 깔려 있고 이런식의 원시예술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야수파가 있었다. 키르히너는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억울했는지 그림의 연도를 조작하기도 한다.
03. 표현주의의 추상 - Emile Nolde
Emile Nolde의 작품은 표현주의 계열에 속하지만 영성을 강조해서 종교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중세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현세가 갑자기 낯설어지니 사람들이 영성에 의지해 종교성을 강하게 띠는 것이다. 키르히너가 세속주의라고 하면 이 사람은 종교적인 느낌이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그린 그림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빙켈만의 관점을 가진 사람이 본다면 이런 것을 퇴화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예술의지고 다른 충동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04. Ding-en-sich
이런 표현주의의 예술 충동 속에 깔려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현대인들의 현실에 대한 불안감, 공포감이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낯설어진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서 동화되려는 것이 아니라 그걸 넘어서려고 한다. 그리고 이 느낌들을 오래전부터 근대인들은 갖고 있었따고 보링거는 얘기한다.
Ding-en-sich라는 개념이 있다. 물 자체, 우리는 세계를 의식할 때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가.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그걸 sense data라고 얘기한다. 우리에게 세계는 감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세계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구조가 다르면 그걸 다르게 받아들이는데 사람들은 이 감각 자료 밑에 무언가 초감각적인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 자체라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느끼는 그것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진짜 세계가 아니다, 어떤 낯섦 같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실을 뚫고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넘어가려는 초월성의 의지라는 것이다. 비가시적인인 세계를 가시화하는 것이 현대 예술의 과제라고 했을 때 파울크레의 말과도 딱 맞아 떨어진다. 파울클레는 현대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보링거의 이야기와 맞아떨어진다.
05. 칸딘스키의 추상
칸딘스키는 예술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칸딘스키는 왜 추상을 했는가. 키르히너나 에밀 놀데는 아직 구상성이 있다. 피카소와 마티스도 아직 구상성이 있다. 그에 반해 칸딘스키는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순수 추상이다. 물자체를 위해서다. 그는 모네의 그림에 나온 짚단을 순수한 형과 색의 유희로 보고 나중에야 짚단이었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 아무도 재현하지 않는 회화의 가능서에 대해 최초로 생각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론화 시키는데, 물질세계애 대한 불만이다. 산업화가 되어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인간들은 물질문명에 찌들어 천박해지고 황폐해진다. 그는 현실과 화해하지 못하고 정신의 상승을 추구한다. 그때 마침 유행이던 신지학을 접한 칸딘스키는 그것을 유일한 구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순수 추상의 회화로 표현한다. 이렇게 칸딘스키가 현대 추상으로 오는 과정을 봐도 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불화가 있고 그걸 뛰어넘으려는 초월성향이 있다. 에밀놀데나 키르히너와 달리 칸딘스키는 굉장히 차갑다. 이런 식의 또 다른 유형의 추상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
06. 파울 클레의 추상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가능성의 지대를 탐색해서 그림으로 실현하는 회화를 통한 천지 창조, Genesis 이것이 바로 파울클레가 추상영역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실을 유일한 절대적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떠나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보링거가 얘기했던 세계와 인간의 낯설음이다. 파울클레는 굉장히 디지털적이다. 아날로그 세계는 결국 여러가지 가능한 세계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디지털로 실험을 하게 되면 다양한 잠재 가능성들이 열린다. 디지털로만 그낭흔 세계들이 있다. 파울 클레도 다른 형상적 잠재성을 실현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현실은 유일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많은 잠재성들이 있고 회화는 자기 눈을 좁은 가시적 현실에다가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바깥의 잠재성 위로 올려야 된다. 그 다음에 그것을 실현 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화는 제2의 Genesis, 예술가는 신의 창조를 계속해간다는 관점이다.
07. 예술에서의 절대적 기준이 무너짐 - 보링거의 의의
이런 추상충동에 의해 예술에서의 절대적 기준이 무너지게 된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 고전주의 18세기 신고전주의 사실상 19세기까지 넘어오고 이끌어왔던 서구 예술의 대 이론이 무너지는 것이다. 고전적인 예술 관념이 절대적으로 유일하게 올바른 양식이 아니라는 것이고 예술 양식에 있어서의 역사주의, 성장하고 이런 식의 발견론 적으로 설명하는 논리가 끊기는 것이다. 오히려 동시적인 양식들의 다양한 존재, 양식적인 다원적 인정이 등장하고 현대 예술이 등장하는 토대가 됐다는 것이다. 사실 보링거의 논문의 상식적인 얘기만 하고 있지만 당시 무르익은 분위기 - 이런 식의 예술은 끝났다 -에 나와서 널리 받아들여 질 수 있었다. 그래서 보링거는 적어도 독일적 맥락에서 추상회하가 등장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되었다.
08. 탄압받는 추상회화
나치는 추상회화들을 퇴화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별을 반대하던 보링거의 이론으로 양자를 구별한 후 보링거와는 반대로 차별한 것이다. 그들인 이 유기적인 양식이 올바르고 게르만적인 양식이라고 보고 추상회화를 퇴폐예술로 몬다. 추상작품들은 대중에게 모용당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키르히너는 자살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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