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Y PAGE/Art

현대예술에 대한 태도들 - 프랑스 고전주의 중심의 상실

by 갓미01 2014. 3. 27.
728x90

1. 한스 제들마이어

 

 한스 제들마이어는 철학자 하이데거와 비슷한 면이 있다. 굉장한 지성과 보수주의가 결합되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뛰어난 미술사학자로 당시 주요한 현대예술의 경향들을 아주 정확히 짚어낸다. 문제는 거기에 대한 평가가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예술에서 모더니티 자체를 인정하지 못한다. '중심의 상실이다'라고 한다. 이것을 퇴폐에술이라고 해서 entartete, 퇴폐적이라고 불렀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굉장히 퇴화했다는 말이다. entartete kunst 이렇게 현대 예술의 상태를 진단했고 이것이 나치의 예술정책이 되어버린다. 나치가 퇴폐예술전을 열어 현대예술가들, 특히 키르히너라든지 파울 클레라든지 이런 작품들을 퇴폐예술로 분류해 돌렸다. 전국에 순회시키면서 모욕을 당하게 만들었다. 반대편에서는 또 대독일전(신고전주의풍) 특히 로마의 거대 전사풍 같은 것들을 영웅화하는 식의 전시회 두 개가 열렸다. 그때 한스 제들마이어가 직접적인 나치의 현대예술탄압정책에 찬성한 것 같지는 않다. 보수주의자들이 현대 예술을 보는 관점을 구현하고 있을 뿐인데, 그 견해가 그것이 극단적으로 받아들여져 그것을 문화정책 삼아 현대예술을 탄압하는 식으로 나온 것이다. 한스 제들마이어는 전후 이런 이유가 몇 년 동안 학교에서 떠나게 된다.

 

 

2. 중심의 상실

 

 중심의 상실을 보면이 사람이 중심적 과제에 대해서 얘기한다. 어느 예술이나 어느 시대든지 중요한 과제가 있고 그것이 예술장르들에 통일성과 질서, 의미를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하면 성당건축이 떠오른다. 성당이라는 것은 하나의 장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건축이자 그 안에 조각 작품이 들어가야 된다. 또한 회화가 있어야 되고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어야 되고. 일종의 종합예술작품이다. 개별 장르는 전체적 과제 속에서 자기의 존재의미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18세기에는 완전하고 기하학적이며 합리적이었던 정원을 영국식 정원으로, 자연에 가깝게 짓는 것이 유행한다. 그때부터 전체성이라는 것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유기적인 통합성이 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개별 장르들이 독립한다. 바로크 시대에 순수주의의 흐름이 시작되어 20세기쯤 들어오게 되면 모든 예술이 다 순수예술이 되어 버린다. 순수회화, 순수음악, 종교적인 목표에 종속된다거나 하는 일이 없어지자 장르들 자체가 다 독립해서 흩어진다. 이것을 진보적인 사람들은 예술이 각자 자기의 자율성을 얻었고 각자 자기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저렇게 다양화되는 것들을 구심점이 흩어지는 것들을 보수주의자들이 볼 때 그것은 혼돈이다.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어법이 다르다. 진보주의자들에게 자유의 반대는 억압이다. 끌어당기는 구심점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자유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유의 반대말은 무질서다. 구심을 가져야 하는데 지금 구심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자신이 자율화된 것으로 근대 개입주의화가 계속 진행되는 것이다.

 

3. 중심 - 신을 닮은 인간

 

 한스 제들마이어는 이런 경향들을 잘 짚어낸다. 그런데 평가는 너무나도 보수적이다. '중심의 상실'이라고 했을 때 중심은 신을 닮은 인간이라는 예술이념이고 그것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고전으로의 회귀를 주장한 빙켈만과 비슷하다. 제들마이어는 잃어버린 중심을 되찾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신을 닮은 인간 anthroponourphsm이라는 것이다.

 

* anthroponourphsm

 헬레니즘 - 인간이 신이 됨

 헤브라이즘 - 신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 신의 곁으로 감.

 

 이렇게 신을 향한, 정신적인 아름다움과 숭고미까지 있던 '중심'이 서구예술을 끌고 왔다. 그러나 현대예술을 보면 성욕, 리비도, 미개민족 등 이성적인 존재, 합리적인 존재가 아닌 그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예전에는 위로 올라가 에로스적 충동이 있었다. 이제는 거꾸로 밑으로 내려가 타나토스 충동이라는 것이다. 퇴폐예술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을 닮은 인간'이라는 이념을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제들마이어의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예술자체가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 재현자체가 없어지는 상황이다. 옛날처럼 맑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추하고 놀랍고 기괴하다 하더라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이런 시대다. 이런 시대에 와서 또다시 얘기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저 얘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나치나 공산주의밖에 없다. 그들은 딱 신고전주의풍이다. 신을 닮은 인간, 좌파의 노동영웅이든 우익의 전쟁영웅이든 간에 영웅적인 인간.

 제들마이어가 원하는 고전고대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부분적인 요소는 차용할 수 있어도 전체적 정신으로 돌아가는건 이미 불가능해진 것이다. 20세기는 완전히 예술의 지평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4. 문화의 보수와 진보

 

 모든 문화보수주의자들이 모더니티를 부정한건 아니다. 미적인 관점에서 진보냐 보수냐는 모더니티에 대한 태도문제로 알 수 있다. 늘 그런것은 아니다. 소위 좌파 안에서도 모더니티를 긍정하는 부류가 있고 부정하는 부류가 있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고전고대이념을 가지고 있다. 굉장히 보수적이다. 그는 모더니즘을 부르주아 퇴폐라고 불렀다. 반면에 브레히트 같은 사람은 반아리스토텔레스극을 한다. 모더니즘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문화보수주의자들 중에서도 오르테가 이 가세트같은 사람들은 모더니트를 긍정했다. 모더니티 예술의 엘리트적 특성 때문이다. 미래는 현대예술을 이해하는 소수의 엘리트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대중들, 이렇게 나눠질 거라는 맥락이다.

 보링거는 추상예술을 정당화했다. 그 당시에는 그가 그걸 정당화할 필요는 예술에 대한 대중들의 관념자체가 보수적이었다는 것이다. 대중들만의 관념이 아니라 현대예술을 잘 알고 있는 미술사학자도 굉장히 보수적이었다는 것이다.

 

728x90

댓글